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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 /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도시의 야경 그리는 드러머 김도엽' (2)... "니 그림 꿈에 나올까 무섭다"는 母親 말에 충격받아 다 불태우니 빛이 보였다

관리자
2022-07-17
조회수 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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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엽의 그림에서는 음률이 느껴진다. 가산 수피아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서울의 야경'.

경북 영일군 신광면 출신인 나는 농사꾼 부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국민학교 4학년 무렵 포항으로 이사를 간다. 대동고 시절에는 교내 미술부장이 될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그때 내 잠재력을 눈여겨 본 미술선생이 있었다. 그가 바로 현재 대구상공회의소 회장인 이재하. 이후 평생의 사부가 되는 화가 윤석균을 만났다. 두 분이 내게 미학적 안목을 심어준다. 누가 알았으랴. 내가 드럼 스틱과 캔버스 붓을 동시에 품게 될 줄을. 1982년 입학해 무려 10여 년 만에 졸업하게 되는 동국대 경주캠퍼스 미술학과 시절은 질풍노도의 나날이었다.

수업보다 술에 더욱 매진했다. 그러다가 욱하고 창작열이 다가오면 45일간 쉼 없이 50호짜리 그림을 50개를 쏟아내기도 했다. 지도교수였던 화가 최영조도 나를 안타깝게 지켜봤다. 나는 사부의 영향 탓인지 '공모전 무용론'을 주창했다. 공모전에 그림을 일절 출품하지 않았다. 제도권에 들어갈 여지를 싹둑 잘라버렸다. 내가 잘나서 그랬는지 못나서 그랬는지 아직 모르겠다.

부산·대구 나이트클럽에서 연주
북과 드럼 결합한 '삼북장' 개발
결혼 후 포항서 미술학원 운영도

이상과 현실사이 왔다갔다 하다
어머니 뼈아픈 지적에 심기일전
그림과 음악, 화폭에서 동기감응
가산 수피아미술관에서 전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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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국제재즈페스티벌에서 공연 중인 애플재즈빅밴드 드러머 김도엽.


◆그림은 이상 음악은 현실

1985년부터 부산의 나이트클럽에서 연주생활을 한다. 7인조 '상류사회'(리더 김대환) 드러머였다. 조방 앞 국제호텔 나이트클럽이었는데 조용필, 나훈아 등의 공연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4년간의 연주생활, 하지만 이 와중에도 학업을 병행하기 위해 동국대 미술대학 수업에도 열중한다. 클럽 일이 끝나면 집에 와서 한두 시간 잠시 눈을 부치고 바로 경주로 갔다. 오랜 시간 내게 그림은 하나의 '이상'이었고 음악은 한갓 '현실'이었다. 하지만 그림은 웅비하지 못하고 자꾸 음악한테 밀려난다.

1990년 결혼을 했다. 포항에 살림집을 차린다. 생계를 위해 해도동에서 시각미술학원을 운영하기도 했다. 개인전 준비 중 교통사고를 당해 집안이 쑥대밭이 된다. 학원도 가정도 모두 파산이었다. 다시 음악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한국 트로트계의 다크호스로 급부상한 장윤정의 주요 히트곡을 작곡했던 작곡가 임강현, 그는 내 친구였다. 나의 음악적 잠재력을 알고 있었던 그가 나를 대전EXPO 홍보유치단원으로 초대한다. 단원은 크게 사물놀이팀 두레패, 그리고 6인조 재즈밴드가 축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재즈밴드 드러머로 활동했다. 일본으로 수차례 홍보 공연을 다녔다. 이후 전국적 명성을 가지고 있던 '두레패'가 내게 러브콜을 한다. 당시 이 사물놀이패는 김덕수 팀과 함께 국내 사물놀이계의 투 톱으로 평가받을 정도였다. 이후 김성녀, 윤문식 등이 리드했던 마당놀이, 나훈아의 빅쇼에도 참여했다. 나는 김영삼 대통령이 관람하는 가운데 명인전 멤버로 초대된 두레패 연주를 위해 새로운 타악기를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국악의 북, 양악의 드럼의 장점을 결합한 '삼북장'이란 신개념 드럼을 개발해 국악계의 주목을 받는다. 그게 있어 판에 박힌 국악이 아니라 퓨전적이고 실험적인 리듬을 개척해나갈 수 있었다.

◆그림도 음악도 다 잃을 고비도

2000년은 최악의 해였다. 그림도 음악도 모두 나를 떠나가고 있었다. 남은 건 몸뚱아리 하나뿐이었다. 생활은 사면초가. 그 모두 자업자득이라고 하기엔 이 놈의 세월이 너무도 무정했다. 입에 풀칠을 하기위해 대구의 모 나이트클럽에서 '안전지대'(리더 감규환) 드러머로 활동했지만 그건 음악이랄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음악도 그림도 모두 '불가항력'이었다.

심기일전이 필요했다. 2002년 용기를 냈다. 대구예술대 실용예술과에 편입한다. 이때 '애플재즈빅밴드'를 창단한 백진우 교수를 만나면서 재즈 드러머의 삶이 시작된다. 당시 대한민국 연주인의 삶은 극도로 불안정했다. 엘프란 놀랄만한 반주기 때문에 나이트클럽 연주인들의 밥줄이 동시다발적으로 끊긴다. 그리고 '미디'란 컴퓨터뮤직 프로그램 때문에 작곡자의 삶도 더욱 힘들어진다. 막 부상하기 시작한 잘생기고 끼로 무장된 쭉쭉 빵빵 아이돌 걸그룹 때문에 기성 구닥다리 연주인은 일제히 '사망선고'를 받는다.

연주인으로서의 지난 시절이 너무 허망했다. '이 기회에 업그레이드 된 음악 공부를 하자'고 자신을 다그친다. 사람도 만나지 않고 두문불출 연습만 했다. 연습하지 않으면 막막한 일상이 날 잡아먹을 것 같았다.

◆기사회생과 신의 한 수

하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2016년 몸이 완전 망가지기 시작한다. 어깨 석회화 근염, 그리고 심각한 고관절로 인해 옴짝달싹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낙담하지 않고 늘 '신의 한수란 바로 김도엽'이라며 모든 걸 낙천적으로 받아들였다. '비 온 뒤 땅이 더 굳건해진다'고 믿었다. 예술 유전자를 가진 자만이 품게 되는 유유자적 마인드였던 것 같다. 그런데 그림이 슬금슬금 징글맞은 날 뒤늦게 찾아왔다. 남구 대명동 영선시장 근처에 있는 화가 황성규의 작업실 한 편을 공유할 수 있었다.

지난해 돌아가신 모친이 죽기 전 내게 뼈아픈 고백을 했다. "도엽아, 너 그림을 보면 꿈에 나타날까 무섭다." 그 말은 내게 너무나 충격이었다. 평생 그려놓았던 수백 점을 모두 태워버렸다. 불효의 세월을 가리고 싶었다. 그림까지도 모친 가슴을 멍들게 하다니…. 잿더미로 만든 과거의 그림 위에서 새로운 풀이 피어났다. 그게 바로 '김도엽 표 야경 시리즈'다. 그 그림을 본 모친이 활짝 웃었다. 생애 첫 효도의 순간이었다.

가장 처음 그린 건 부산항 야경이다. 그리고 수성교~상동까지 품은 신천 야경, 뒤이어 서울의 야경이 연이어 탄생한다. 눅진한 나이트클럽의 조명, 그리고 밴드 음악의 율동, 그게 내 화폭에서 야경으로 피어났다. 그림과 음악이 '동기감응(同氣感應)'하기 시작한 셈이랄까.

2006년부터 비로소 나의 밴드를 만들고 싶었다. 이렇게 해서 12인조 김도엽 탑 밴드가 탄생한다. 그리고 최근에는 리더 보컬 임배원, 기타리스트 김종만, 건반주자 루미, 베이스 송성훈 등으로 구성된 5인조 크로스오버 밴드 '더 펠로스'의 드러머로도 활동 중이다.

내 야경시리즈는 지난달 18일부터 10월 초까지 칠곡 가산 수피아 미술관에서 전시 중이다.

글·사진=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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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학하들안2길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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